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 민경욱 옮김 | 소미미디어 출판 | 일본 소설 | 미스터리/스릴러
히가시노 게이고의 '추리소설가의 살인사건'은 2001년 발표된 단편 모음집으로, 8개의 단편 모두 추리소설가와 관련된 내용을 담았다는 공통점이 있어요.
소위 '병맛 유머'와 풍자를 넘나드는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어서, 유머 코드가 맞는 독자에게는 정말 재미있을 것이고 진지한 글을 좋아하는 분이라면 싫어할 수도 있는,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릴만한 책입니다. 개인적으로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유머감각이 상당히 뛰어나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던, 마음에 드는 글이었어요.
1. 세금 대책 살인사건
2. 이과계 살인사건
3. 범인 맞추기 소설 살인사건(문제편•해결편)
4. 고령화 사회 살인사건
5. 예고소설 살인사건
6. 장편소설 살인사건
7. 마카제관 살인 사건(최종회•마지막 다섯 장)
8. 독서 기계 살인사건
세금대책 살인사건
그냥저냥 벌어먹고 살던 추리소설가가 올해 운 좋게도 큰돈을 벌게 됩니다. 갑작스러운 횡재에 기분 좋아 앞뒤 재지 않고 돈을 펑펑 썼는데, 연말이 되어 내년에 내야 할 세금을 알고는 경악하고 맙니다. 이미 번 돈을 다 써 버려서 세금을 지불할 능력도 되지 않아요. 결국 그는 쇼핑비용을 자신의 소설을 쓰기 위한 경비로 처리할 결심을 하게 되는데...
제게 정말 큰 웃음을 주었던 첫 번째 단편입니다. 추리소설가의 꼼수가 괘씸하면서도 솔직히 너무나 공감되더라고요. 누구나 세금을 합법적 테두리 안에서 최대한 적게 내고 싶어 하니까요. 결국 추리소설가의 꼼수는 크나큰 부메랑으로 되돌아오는 결말을 맞이합니다. 이 글을 읽고 히가시노 게이고를 다시 봤어요. 당신, 이렇게 웃길 줄 아는 사람이었어?
이과계 살인사건
세상에는 이과계 인간과 아닌 인간이 있다. 유능한 과학자들은 이과계 인간에게만 과학적 지식을 교육해야 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재능 없는 인간에게 과학을 가르치는 건 시간낭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에 반대하는 세력이 있다. 이로 인해 살인사건이 발생하게 되는데...
진지한 내용이지만 사실 병맛 유머에 가까운 이야기입니다.
문과계 인간으로서 우수수 쏟아져 나오는 이과계 지식에 정신이 혼미해지는 기분이었어요. 활자를 읽기는 했으나 머리에 들어오는 건 하나도 없었죠. 아마 작가도 독자가 이걸 다 이해하고 읽으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을 거예요. 나중에 가서는 이과 지식에 대한 내용은 대충 건너뛰며 읽었습니다.
전문적인 과학지식을 어렵게 전달하고,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며 우월감을 가지는 이과계 인간들에 대한 풍자 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이과형 인간들에게 콤플렉스를 가지는 저 같은 문과형 인간에 대한 풍자 같기도 합니다. 솔직히 정말 재미없다고 생각하며 읽었는데, 마지막 반전이 참신해서 움찔 놀라긴 했어요.ㅋㅋ
범인 맞추기 소설 살인사건(문제편•해결편)
유명 추리소설가의 신작을 출판하기 위해 4명의 출판 편집인들이 경쟁하고 있다. 추리소설가는 신작 소설의 범인을 제일 먼저 맞춘 사람에게 자기 신작의 출판을 맡기겠다는 조건을 내걸고, 그 가운데 진짜 살인사건이 발생하고 마는데...
'추리소설가의 살인사건'에 나오는 이야기 대부분이 소설 속의 소설이라는 액자식 구성이지만, 그 구조를 제일 탁월하게 구현했다는 생각이 드는 소설입니다. 한편으로는 잘 나가는 소설가의 갑질과 그 앞에 을일 수밖에 없는 편집자의 고충도 드러나 있어 씁쓸하기도 합니다.
고령화 사회 살인사건
치매에 걸린 소설가를 보조하는 편집인의 고충을 담고 있습니다. 마지막에 나름의 반전도 있어요. 우리나라도 고령화 사회에 접어든 지 20년이 넘은 만큼, 이 상황이 웃긴 한편으로 농담으로만 받아들일 수 없어 씁쓸하고 슬픈 기분이 드는 글입니다.
예고소설 살인사건
꾸준히 노력하고 있지만 결정적 한방이 없어 고전하는 신인 소설가에게 출세의 기회가 찾아옵니다. 그의 소설 속 내용과 완전히 똑같은 살인사건이 벌어진 겁니다. 사람들은 주인공의 글에 열광합니다. 결국 나중에는 범인이 작가에게 직접 연락하여 상부상조를 제안하게 되는데...
가장 전형적인 추리소설의 플롯을 따르고 있어 흥미진진합니다. 범인의 정체가 직접적으로 밝혀지진 않았지만 독자 누구나 충분히 추측할 수 있어요.
장편소설 살인사건
출판업계 풍토에 대한 풍자적인 요소가 제일 강한 단편입니다.
자신이 쓰고 싶은 글과 독자가 읽고 싶은 글이 다를 때, 작가는 딜레마에 빠집니다. 자기 신념대로 가자니 아무도 읽지 않아 쓰는 의미가 없고, 읽히는 글을 쓰자니 신념에 위배되니까요.
결국 이 단편의 주인공은 편집자의 조언에 따라 유행을 따르는 길디 긴 글을 쓰는데, 그 변해가는 양상이 너무 웃겨서 배꼽을 잡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결국 마지막 장면에서 저는 폭소를 터뜨리고 말았는데, 과장되긴 했지만 웃픈 현실을 잘 반영했다고 느꼈습니다.
마카제관 살인 사건(최종회•마지막 다섯 장)
짧고 강한 인상을 남긴 글입니다. 마감이 코앞에 닥친 히가시노 게이고 본인의 다급한 심정이 듬뿍 담겨있는 것만 같습니다.
독서 기계 살인사건
소설을 읽고 평론하는 것을 업으로 삼고 있는 주인공에게 독서 기계를 파는 영업사원이 찾아옵니다. 이 기계는 놀랍게도 책을 읽고 요약본을 만들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버전의 서평을 대신 써 주는 탁월한 기능을 보여줍니다. 심지어 평론가 본인의 글을 읽고 학습한 다음, 그 평론가의 스타일대로 글을 쓰기까지 합니다. 결국 아무도 책을 읽지 않고 이 기계에 의존하는 시대가 됩니다. 한편, 평론가뿐만 아니라 작가를 위한 기계까지 출시되는데...
이 마지막 단편을 읽고 얼마나 충격받았는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이 책이 발표된 건 2001년으로 당시에는 SF 영역에 속하는 이야기였으나, 이제 더 이상 상상 속의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임을 우리 모두는 알고 있죠.
딥러닝 인공지능(AI)의 급격한 발달로 인해, 현재 AI는 그림도 그리고 소설도 쓸 수 있습니다. 아직 초기 단계라고는 해도 기계의 학습 능력은 사람의 속도를 뛰어넘는 데다 체력적 한계도 없으니 더더욱 가속화될 겁니다. 그래서 이 단편의 내용에 마냥 웃을 수만은 없었어요. 눈앞에 닥친 섬뜩한 현실이니까요.
다만 딥러닝 AI를 부정적인 관점에서만 바라볼 필요는 없어요. 이미 시작된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습니다. 결국 우리에게는 이 변화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활용하도록 다 함께 논의하는 지난한 과정이 필요할 겁니다.
지금까지 8개 단편 각각에 대해 짤막하게 리뷰해 보았습니다.
'추리소설가의 살인사건'은 저에게 히가시노 게이고의 새로운 발견이라고 할 만한 글이었습니다. 그를 그저 양산형 추리소설 작가라고만 생각했는데, 작품을 읽으면 읽을수록 굉장히 다양한 장르에 도전해 온, 장난기 많고 재미있는 사람이라는 걸 깨닫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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